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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 6. 6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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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재공>사정공묘갈명(司正公墓碣銘)휘귀산(諱龜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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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공묘갈명(司正公墓碣銘)
公親沒後書座隅曰先君早世鞠我二兒劬勞罔極哀纏軒墀此寂寥十六字而公哀慕之誠可與蓼莪 後先讀此不興起於孝思非人也然則公既孝矣又施及後人其功曷可以少之哉是知生質之美不但 以子於樂齋從子於虔谷而得於擩染然也又豈以麗季短喪而蹈襲於非禮也生質如公染擩如公實 踐如公宜其民到于今稱之樂齋諱瑛麗季罔僕與弟虔谷瑜爲麗完臣祖農隱諱元吉秉執同圃冶封 玉川君諡忠獻是於玉川府院君諱佺子也版圖判書諱洪珪孫也檢校大將軍諱璋曾孫也妣郡夫人 延安金氏考大護軍寬義公諱龜山字雲浩趙氏玉川人生淳昌寓第進士補司正生卒年月不詳墓虔 谷子坐從祖墓也夫人首陽呉氏中郎將謹女墓合封二男士敦正言士淳郡守一女適景居倫士敦子 珩司正士淳三子俊孫敎授淵縣監溥持平公之墓古有石泐不可讀將改竪別用文後孫壽民俾字萬 爲銘銘曰父忠子孝世流其芳公孝伊何十六隅銘承襲詩禮兄弟齊名虔谷之原百世風聲
幸州 奇字萬 撰 參奉松沙
사정공묘갈명(司正公墓碣銘)
공이 아버지 조세하시고 어머니 혼자서 우리 어린 두 아들을 기르시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고를 하셨는데 슬픔이 뜰과 처마를 둘렀다는 十六자를 좌우명으로 걸었다.(선군조세국아이아구로망극애전헌지(先君 早世鞠我二兒劬勞罔極哀纏軒墀)) 공의 애모한 지성은 가히 육아(蓼莪:부모를 봉양코저 하여도 안 계신다는 뜻)로 더불어 선후를 가리기 어렵도다. 이를 읽고 효도할 생각을 안 일으킨 자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런 즉 공은 이미 효도하였고 또 뒷사람에게까지 미쳤으니 그 공을 어찌 적다 하리요. 비로소 공의 천성이 아름다움을 알겠도다 요재공의 아들이요 건곡공의 종자로써 훈자받은 것 뿐이 아니니 또 어찌 여말단상(麗末短喪)의 비례(非禮)를 답습하겠는가. 천성이 공과 같고 배움이 공과 같으며 실천이 공 같으니 향방이 지금껏 칭송한 것이 마땅하도다. 요재공(樂齋公)의 휘는 영(瑛)인데 여계불복신(麗季不服臣)으로 아우 건곡공유(虔谷公瑜)로 더불어 고려의 참된 신하가 되었고 조농은 휘원길(趙農隱諱元吉)은 포은 야은과 같이 떳떳한 도의를 잡아 옥천군에 봉장되어 충헌(忠獻)이라 시호하였는데 이 분이 바로 옥천부원군 휘 전(佺)의 아들이요 판도판서 휘 홍규(洪珪)의 손자이며 검교대장군 휘 장(璋)의 증손이었다. 비(妣)는 군부인 연안김씨인데 대호군 관의(寬義)의 따님이었다. 공의 휘는 구산(龜山)이요 자는 운호(雲浩)인데. 옥천조씨로 순창본가에서 출생하였고 생졸년월은 미상이며 묘소는 조고묘 좌측 자좌였다. 배는 수양오씨(首陽呉氏) 중랑장근(中郎將謹)의 따님으로 묘소는 합봉이고 두 아들 두셨는데 사돈(士敦)은 정언이요 사순(士淳)은 군수이며 녀는 경거륜(景居倫)의 처였다. 사돈의 아들 형(珩)은 사정이요 사순은 三자를 두셨는데 준손(俊孫)은 교수요 연(淵)은 현감이며 부(溥)는 지평이셨다.
공의 묘소에 먼저 석의가 있으나 이지러져 읽을 수 없으므로 장차 다시 세워 새기고자 하여 후손 수민(壽民)이 우만(字萬)에게 청문함으로 새겨 가로되 아버지는 충신이요 아들은 효자로 그 향기가 대로 흘렀도다. (父忠子孝世流其芳) 공의 효성이 어떠하였던고. 十六자 명의로다. (公孝伊何十六隅銘) 시예를 이어 받아 형제가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다. (承襲詩禮兄弟齊名) 건곡의 언덕에 풍성이 百世하리라. (虔谷之原百世風聲)
행주(幸州) 기우만(奇字萬) 찬(撰) 참봉송사(參奉松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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